1945년 8월 14일 일본 제국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다음날 8월 15일 천황 쇼와 덴노는 옥음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항복을 알렸습니다. 같은 날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며 광복절을 기념했습니다.
한국에 거주 중이던 일본인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 제국의 패전이라는 사실에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식민자로써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광복 후에 한국에 남은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일 정오 무렵 경성을 포함한 일본인 거주 지역에는 중대발표가 있으니 경청하라는 벽보가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벽보를 본 일본인들과 일부 조선인들은 정오에 맞춰 라디오를 켰고, 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 천황이 직접 방송을 한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폐전 소식이 흘러나오자 일본인들은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방송을 들을 조선인들의 반응은 ‘이게 무슨 일이지?’였습니다. 일본인이 아니면 알아듣기 힘든 문어체를 서서 방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도 드문 상황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 흘러나오니 해방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해석이 가능한 일부 지식인들조차 끝까지 항목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고 종전만 언급되는 방송에 모두가 의아했습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과 일본인들의 수상한 분위기 때문인지 오후부터 해방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형무소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면서 경성에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한편 경성전기 주식회사의 사장이었던 호즈미 사로쿠는 방송을 듣자마자 직원들에게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이 일어나는 날에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신신당부가 섞인 말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중순, 돈 있는 사람들은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습니다. “나만 살겠다”라는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이라는 애국심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또 조선 땅에서 일군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 한 푼도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을지 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은 총 913건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신사였습니다. 또 개인을 상대로 한 살인과 폭행은 총 267건으로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교사, 공무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당시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오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은 집계에서 누락되었으며 보고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일본인 상관들은 조선인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먼저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상관보다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징발에 앞장섰던 조선인들에게 악감정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18일 조선총독부는 각 기관에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의 사진을 모두 불태워라’, ‘또 각 지역의 신사에 연락해 위패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라’ 전달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습니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문화통치 시기(1920년 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행에는 돈을 일출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8월 15일에만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갔습니다. 실제로 8월 16일 하루 동안 경성은행에서만 2억 원이 인출되었습니다. 이런 속도로 돈이 빠져나간다면 은행은 파산이 날 것입니다. 총독부에서는 “지금 상황에 현금을 소지하는 건 위험하다”는 식으로 일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습니다.
결국 23일이 되던 날 모든 은행은 예금이 초과되었고 일본인들은 불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총독부의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는 다소 다급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예금 통장과 증서만 있으면 언제든지
일본에서 인출이 가능하다”라는 발표를 합니다. 문제는 이 내용이 일본 정부와 협의되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일종의 브로커들도 증가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각국에 퍼져있는 재주 일본인들에게 본토의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수송선 마련이 어려우니
가급적이면 버티라는 식으로 대처했습니다. 일본은 여러 대공습을 더불어 핵폭탄이 두 번이나 떨어졌기 때문에 해외로부터 오는 수백만 명의 의식주를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부 일본인들은 정부의 무책임한 대책에 대해 조선에 남겠다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잔류파와 귀화파 간의 갈등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9월부터 미군이 진주하게 되며 일본인의 생활을 제재했습니다.
한반도에 들어선 미국은 일본인들에게 송환선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송환순서는 조선인과 미군에게 있어서 불안한 요소였던 군인과 경찰을 가장 먼저 내보낸 다음, 일반 민간인과 고위 공직자 순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안전을 생각해 군인과 경찰을 가장 나중에 송화시키고자했던 일본의 생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미군정은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에 여러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갈 짐에는 중량을 제한했으며 현금은 1,000엔 이상의 반출을 금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은 송환선보다는 밀선을 선택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을 보면 민간인은 약 70여만 명, 군인은 20여만 명으로 추계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20만 명 정도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본으로 돌아갈 때 밀항선과 공식 송환선 중에서 무엇을 탈 것인가는 단순히 교통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향후 그들의 인생이 걸린 도박과도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밀항선의 경우 검역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전염병에 감염될 위험성도 있었고, 악덕 업자를 만나면 어렵게 가져온 재산마저 모두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밀항선을 타고자 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공식 송환선을 타고 가면 심사과정에서 반출 상태를 면밀히 수색당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일본인들
북한에 남은 일본인들은, 남한측의 사람들보다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련군들은 주둔 비용을 현지 조달로 채웠습니다. 현지 조달의 대상은 일본인들이었고, 소련군들은 일본인의 집을 샅샅이 뒤지며 먹을거리와 생필품 등을 챙겨갔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술에 잔뜩 취해 폭행을 저지르는 사건도 빈번했습니다. 거줄민들과의 불미스러운 접촉은 두려움으로 퍼졌고, 온갖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여러 부녀자들은 머리를 민 여성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문을 열고 머리를 밀었습니다.
소련군은 산업 시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일본인으로 채웠습니다. 당시 억류당한 일본인은 약 7만 명에 달합니다. 소련군과 현지 정권에 의해 수용소에 갖혀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뺏기고 발까지 묶인 일본인들은 살아가기 위해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도코 요시마사는 원래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찾게 된 것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의 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워 물을 데우는 일이라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시켰고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물을 대령해야 했습니다. “와! 패전 덕분에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다 뵙게 되네.”라는 말로 비꼬았습니다.
빈곤에 못이겨 조선인 냉면 가게나 주막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도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일명 ‘로스케 마담’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의 주요 고객은 소련 군인들이었으며 소련군 접대에 나섰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은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북한에 억류된 일본인들은 1946년 6월이 되어서 본토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북한측은 일본의 엔지니어들이 탐났던 나머지 남을 사람은 남아도 된다고 했지만 단 한명도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인이 탈북을 해 남한으로 넘어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본국인 일본에 도착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기대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건 차별과 멸시였습니다.
당시 귀국한 일본인들이 주거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다키카와 나쓰요라는 여성은 얹혀사는 삶에 못이겨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다키카와의 가족 8명이 신세를 지면서 갈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귀국자들의 차별은 극심한 결혼난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혈통을 믿을 수 없다느니 조롱하며, 경멸의 눈빛을 보냈습니다. 본토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라며 히키아게샤라 칭하며 멸시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3줄 요약]
1.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한국은 광복절을 기념했지만, 일본인들은 패전이라는 충격에 휩싸임.
2. 패전 이후, 남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귀화파 vs 잔류파로 나뉘어짐.
3.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각종 제재를 당했으며, 귀국한 일본인들은 차별과 멸시를 받음.
대한민국 만세!